- 인사말
- 일원상진리(一圓相眞理)
- 일원상 서원문(一圓相 誓願文)
- 일상수행의 요법
인간의 영혼은 진리를 못 깨달았어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세계의 길과 마음을 깨달은 영혼만이 볼 수 있는 영적인 길이 있지요.
마음을 깨달은 영혼은 지혜로워서 마음이 움직일 때 마음 지도를 볼 수가 있어서 가는 길이 아름다운 꽃길 인지 험난한 가시밭길 인지를 알 수가 있지요.
그래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에게 건강과 행복을 오게 하는 지혜의 길을 가지만,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파멸과 불행으로 치닫는 어리석은 길을 가게 되지요.
여기 maum.club 의 본성에 바탕한 마음공부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마음을 제대로 깨닫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실행하면 진정한 행복을 누림과 동시에 자신이 속한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단체, 국가, 세계도 평화 안락한 낙원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도 갖추게 해 드릴 것입니다.
본성에 바탕하지 않은 마음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자신을 불행과 비극으로 이끌 뿐이므로, 이러한 후회하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잘못된 삶에 종지부를 찍고, 본성에 바탕한 마음공부로 희망과 은혜 충만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본성에 바탕한 마음공부를 제공하는 maum.club 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언제나 함께하는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김경태 합장.
김경태(본명 김기영)
1962년 부산 해운대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및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저서 :
사랑을 안다면(부제 : 종교협력운동),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노자 도덕경 해설 책, 노자를 팔아먹는 남자 그 남자를 팔아먹은 여자, 시간과공간사, 2001
급수별 한자교재, 부수로 한자 휘어잡기<8 급부터 1급까지(국내 최초 1급 완성)>, 시간과 공간사, 2003
활동 :
동아대학교 국제교류교육원 강사 역임
동의대학교 외국어교육원 강사 역임
스카이라이프 한방건강TV '김경태의 한자보감’ 강사 역임
인터넷 동영상 강의, busuro.com 대표 역임
마음공부 동영상 강의 maum.club 대표
마음공부 강사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本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⓾
1) 일원(一圓)은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원(本源)
일원은 우주의 모든 것의 근원으로써, 기적(氣的)으로는 진공묘유의 조화에서 근원으로서 진공인데, 이 진공은 파장이면서도 또한 무수한 미립자가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이를 진공의 양면성이라 표현할 수 있고, 영적(靈的)으로는 공적성성하고 공적영지한 광명이라 텅 비어 고요한 공적의 진공에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가 빛처럼 밝게 갊아 있어서 우리의 영혼이 진공에 합일한 입정상태에서는 육근작용이 멈추어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정(靜)한 정신 상태이지만 진공에 합일했던 영혼이 출정하여 육근작용으로 영지(靈知)인 분별성이 일어나면 영혼은 동(動)한 마음 상태가 되는 것으로써, 이를 성품의 양면성이라 할 수 있지요.
즉 일원은 영적으로는 공적성성한 본성과 공적영지한 분별성이 합쳐진 성품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제각기 영혼의 분별을 통해 이어지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로서 이를 불교적 용어로는 법신불이라 하고 기독교적 용어로는 하나님이라 표현하지요.
2) 제불(諸佛) 제성(諸聖)의 심인(心印)
제불(諸佛) 제성(諸聖)의 심인(心印)이란 모든 부처 모든 성인(聖人)들의 마음도장이라는 뜻으로써, 마음이란 분별을 뜻하고, 도장은 찍을 때마다 항상 똑 같은 모양이 나타나게 되죠.
즉 제불제성의 심인이란 분별을 하는 모든 부처와 성인들의 마음이 자신의 개인적인 주관이 개입되기 전의 우주의 마음 즉 천지의 식(識)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는 공적성성한 본성과 공적영지한 분별성 중에서 공적영지한 분별성이라 할 수 있지요.
3)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본성(本性)
우리들 영혼은 공적성성한 본성과 공적영지한 분별성에 의해 혹은 정(靜)하기도 하고 혹은 동(動)하기도 하는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말은 영혼이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공적성성한 본성에 합일 되었을 때를 의미하지요.
4) 대소유무(大小有無)에 분별(分別)이 없는 자리
대(大) ; 우주만유의 나타나지 않은 근본 자리로서 물질적으로는 진공의 상태, 영적으로는 진공의 고요한 공적상태에 별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성성한 정신 상태로써 자성의 정이 세워진 입정의 상태를 뜻함
소(小) ; 물질적으로는 우주만유가 제각기 형형색색으로 나타난 모양, 정신적으로는 육경을 통해 육식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마음과 생각들
유무(有無) ; 물질적으로는 우주만유가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소에서 대로 대에서 소로 변화하는 것이며, 진공에서 묘유로 묘유에서 진공으로의 조화이며, 정신적으로는 공적영지한 자성혜에서 공적성성한 자성정으로 공적성성한 자성정에서 공적영지한 자성혜로 정신과 마음과 생각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나는 변화
인간의 성품은 정과 혜가 있는데, 여기서의 분별이 없는 자리라고 할 때는 성품의 정에 입정을 하였을 때를 의미하며, 이때의 사람의 영혼은 우주의 공적영지의 광명을 안으로는 자신의 중심인 단전을 통해 진공을 비추는 회광의 상태이고, 밖으로는 반조를 하지를 않음으로 인해 육근을 통한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분별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일상생활(日常生活)을 할 때 정신적인 휴식상태라고 할 수 있는 자성의 정을 세우는 입정을 할 줄을 모르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음식을 먹고 몸으로 감촉하여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분별하는 마음을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생각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됨으로써 정신력의 피폐로 인해 착각과 망상, 신경쇠약, 불면증을 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정신병이라는 불행한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공적성성한 자성의 정에 들어갈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차를 운행할 때 달리다가 위험에 직면하면 브레이크를 잡아 차를 멈출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처럼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차의 브레이크를 잡는 기술의 중요성은 인식하여 열심히 배우면서도 진정 그 차를 운전하는 우리의 마음을 멈추고 조절하는 기술은 등한시하기에 진정 원하는 행복은 오지 않고 불행하게도 원하지도 않는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5) 생멸거래(生滅去來)에 변(變)함이 없는 자리
생멸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태어나고 죽는 것을 의미한다면 거래란 진리를 깨달은 성현들의 생사를 의미하지요.
우리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우주의 궁극적 진리인 일원(법신불, 하나님, 무극, 도, 자연)은 공적성성한 면과 공적영지한 면이 있어서, 공적영지한 면을 보면, 우리가 과거에 지은 바는 지은 바대로 과보를 주고 또한 현재부터 새로이 마음 사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에 맞게 복과 죄를 줌으로 생멸거래에 변함이 있는 것이지만, 공적성성한 면을 보면, 음양이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이므로 어떠한 생멸거래도 없기 때문에 제각기 영혼을 가진 사람의 영식(靈識)도 육근을 통해 육진을 비추지 않는 자성에 회광하여 입정에 든 공적성성한 상태이므로 생멸과 거래에 대한 분별성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두고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으로 살았을 때 나쁜 죄를 수없이 짓지마는 몸은 비록 죽어서 지수화풍으로 흩어지며 진공으로 돌아가나 그 진공에 영식이 있어서 우리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과거 전생에 지은 바 모든 몸과 마음의 행위가 빠짐없이 기록되므로, 사람의 영혼이 회광을 하여 자성의 정에 든다고 하여도 그 기록은 없어지지 않고 일원의 공적영지의 광명에 의해 언젠가는 인과보응의 이치에 따라 과거나 전생에 지은 바 죄와 복에 대한 과보는 조금도 틀림이 없이 다 받게 되는 것이지요.
6) 선악업보(善惡業報)가 끊어진 자리
우주의 궁극적 진리인 일원은 공적영지의 광명이 발하지 않는 자성에 입정한 공적성성한 상태에서는 분별의 인식작용이 정지된 상태이므로, 좋다거나 싫다는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여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선행과 악행에 대한 과보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7)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
우주의 근원적 진리인 일원은 물질적으로는 진공이라 분별할 대상이 없고 또한 정신적으로도 공적한 가운데 성성함이라 분별의 인식작용이 정지된 입정의 상태이므로, 언어나 명상에 대한 인식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8)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光明)을 따라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인 우주의 공적영지한 분별성에 의해
9)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처럼 드러나고
일원의 공적영지의 광명은 지극히 밝고, 지극히 정성스럽고, 지극히 공정하고, 순리자연하고, 광대무량하고, 영원불멸하고, 길흉이 없고, 응용에 무념하므로⑪ 모든 분별과 차별이 털끝만큼도 틀림없이 분명하여 인과응보가 확실하다는 뜻이지요.
10)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隱現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일원상진리는 우주의 모든 것을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진공묘유의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지요.
진공을 기적(氣的)으로는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입자이면서도 파동의 상태라면, 영적(靈的)으로는 공적성성(空寂惺惺)한 무념(無念)의 자성정(自性定) 즉 입정을 하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인 정신을 의미하고, 묘유를 기적으로는 음양과 오행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삼라만상이라면, 영적으로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무상(無相)의 자성혜(自性慧) 즉 출정을 하면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일어나는 분별인 마음과 생각을 의미하지요.
이처럼 공적성성하고 공적영지한 성품을 깨달은 영혼은 극락과 낙원을 체험하며 은혜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이를 깨닫지 못한 영혼은 공적영지가 아닌 탐진치로 인한 무명의 중생심으로 살아가기에 육도윤회를 하며 영원토록 악도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이지요.
일원(一圓)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이요 유무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인 바 천지(天地) 부모(父母) 동포(同胞) 법률(法律)의 본원(本源)이요 제불(諸佛) 조사(祖師) 범부(凡夫) 중생(衆生)의 성품(性稟)으로 능이성유상(能以成有常)하고 능이성무상(能以成無常)하여 유상(有常)으로 보면 상주불멸(常住不滅)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無量世界)를 전개(展開)하였고, 무상(無常)으로 보면 우주(宇宙)의 성주괴공(成住壞空)과 만물(萬物)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작용(心身作用)을 따라 육도(六道)로 변화(變化)를 시켜 혹(或)은 진급(進級)으로 혹(或)은 강급(降級)으로 혹(或)은 은생어해(恩生於害)로 혹(或)은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無量世界)를 전개(展開)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衆生)은 이 법신불(法身佛) 일원상(一圓相)을 체(體) 받아서 심신(心身)을 원만(圓滿)하게 수호(守護)하는 공부(工夫)를 하며 또는 사리(事理)를 원만(圓滿)하게 아는 공부(工夫)를 하며 또는 심신(心身)을 원만(圓滿)하게 사용(使用)하는 공부(工夫)를 지성(至誠)으로 하여 진급(進級)이 되고 은혜(恩惠)는 입을지언정 강급(降級)이 되거나 해독(害毒)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一圓)의 위력(威力)을 얻도록 까지 서원(誓願)하고 일원(一圓)의 체성(體性)에 합(合)하도록 까지 서원(誓願)함.⑫
1) 일원(一圓)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
영혼이 본성(本性)의 공적성성(空寂惺惺)한 진공(眞空)이 있는 단전(丹田)에 집중하여 입정(入定)을 하면 육근(六根)을 통한 육식(六識)의 작용이 중단되어져서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영혼의 휴식 상태가 되는데 이를 언어도단의 입정처라는 것이지요.
부연하여 설명하면, 입정처란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의 경지로써,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 비법상과 같은 상을 가진 무명의 중생심으로써는 어떠한 부처님의 설법이나 경전을 통해서도 결코 체험하거나 깨달을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하는데, 이는 상(相)이 없는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인 정신에 바탕한 공적영지의 광명인 무상의 자성혜가 드러난 마음일 때 비로소 언어로도 깨달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길이 된다는 뜻이지요.
2) 유무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
인간과 같은 유정물(有情物)에 있어서 일원은, 영적(靈的)으로는 자기의 성품이라 공적성성하고 공적영지하여, 영적으로 활동이 없는 입정인 공적성성일 때를 무(無)라 하고 영적활동이 있는 출정인 공적영지일 때를 유(有)라고 하는데, 그러므로 유라고 한정지을 수도 없고 또한 무라고도 한정지을 수도 없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지만, 유와 무를 모두 포함하여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한 것으로써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고 유의 세계로 나오는 문이기도 한 것이며, 기적(氣的)으로도 유정물의 몸은 무인 진공에서 유인 묘유로 생하여 나타났다가 유인 묘유는 다시 무인 진공으로 사라지는 조화가 반복해서 이루어지므로, 유인 것 같으면서도 무이고 무인 것 같으면서도 유이기도 하여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나 또한 유무를 모두 포함하여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한 것이므로 이를 유무초월의 생사문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일원은 유와 무가 끊임없이 돌고 돌아 생겼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생겨나기를 영원히 반복하는데, 부처는 유무를 초월한 성품을 깨달아서 일원상 진리의 오묘한 이치의 문을 열 수 있지만, 중생은 깨닫지 못하여 생사의 이치를 알 수가 없어서 일원의 문을 열 수 없기에 이 유무초월의 생사문에서의 문이라는 글자는 일원상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구분 짓는 기준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글자라 할 수가 있지요.
3) 천지(天地) 부모(父母) 동포(同胞) 법률(法律)의 본원(本源)
우리는 하늘과 땅인 천지의 은혜, 낳아 주신 부모님의 은혜, 사농공상 직업으로 서로가 사회를 형성하여 상부상조하며 은혜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주는 동포의 은혜,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법률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러한 네 가지가 바탕하고 있으므로 우주만유의 본원이라 하는 것이지요.
4) 제불(諸佛) 조사(祖師) 범부(凡夫) 중생(衆生)의 성품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자나 못 깨달은 자를 포함한 모든 유정물은 영적으로 공적성성한 자성정과 공적영지한 자성혜로 표현되는 일원이라는 성품에 바탕해서 존재를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5) 능이성유상(能以成有常) ; 변함없이 항상 하는 것
일원상진리의 불생불멸하고 인과보응하는 이치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유상임.
6) 능이성무상(能以成無常) ;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함
일원상진리에서 우주의 성주괴공, 인간의 생로병사, 계절의 춘하추동과 같이 변화하는 것은 무상임
7) 유상(有常)으로 보면 상주불멸(常住不滅)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無量世界)를 전개(展開)하였고
일원상진리는 변화하지 않는 근원적인 면을 보면 없어지지 않고 항상 그대로 존재하는 진공에 바탕하여 묘유인 삼라만상으로 한량없이 전개되어 있고
8) 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일원상진리의 변화하는 묘유의 면을 보면,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시키고 만물은 생로병사로 변화시키고, 태란습화(胎卵濕化)로 태어나는 사생(四生)은 영혼의 심신작용에 따라 천상 인도 수라 아귀 축생 지옥인 육도로 변화시키므로, 심신을 일원상 진리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대로 사용하면 진급이 되어 은혜를 입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강급이 되어 악도에 들어가게 하여 고통과 불행의 길이 한없이 전개되도록 한다는 뜻이지요.
9)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體) 받아서
일원상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은 법신불 일원상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을 본받아서
10)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守護)하는 공부(工夫)를 하며
정신수양으로 무념의 자성정을 세워서 심신이 온전해지도록 하며
11) 사리(事理)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천조의 대소유무와 인간의 시비이해를 무상의 자성혜를 바탕한 연구로 올바르게 알도록 하며
12)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정신수양은 무념의 자성정을 세우는 것이고, 사리연구는 무상의 자성혜에 바탕하여 천조의 대소유무와 인간의 시비이해를 알도록 하는 것인데,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한다는 의미는 무주의 자성계로써 일이 없을 때는 무념의 자성정을 세우고 일이 있을 때는 성품의 공적영지의 광명인 무상의 자성혜에 바탕하여 영혼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두 단계인 무상의 사리연구와 무상의 작업취사 즉 무상의 자성계가 잘 되도록 정성을 다하여
13)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거나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원만한 인품을 이루어 인격적 등급이 높아져서 세상의 은혜와 환영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될지언정 인격적 등급이 낮아져서 진리와 세상으로부터 벌을 받고 배척받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14)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 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 서원함
공적영지한 무상의 자성혜를 세워 천조의 대소유무와 인간의 시비이해를 원만하게 아는 사리연구의 위력과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릴 줄 아는 원만한 작업취사의 위력을 갖추기를 서원하고, 이러한 위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데 그 근본이 되는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에 합하기를 서원함.
이와 같은 일원상서원문의 결론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일이 없을 때에는 자성의 근본인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自性定)을 세워 정신을 양성하고, 일이 있을 때에는 자성의 작용인 공적영지의 무상의 자성혜에 바탕하여 생활 속에서 자신의 의지로 육근을 작용할 때, 무상의 사리연구와 무상의 작업취사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생의 삶이 부처의 삶이 되도록 하자는 것인데, 이는 단전주선의 5단계인 무주의 자성계를 뜻하는 것이지요.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4) 신(信)과 분(奮)과 의(疑)와 성(誠)으로써 불신(不信)과 탐욕(貪慾)과 나태(懶怠)와 우치(愚癡)를 제거하자
5)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6)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⑬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심지를 해석하면 마음땅인데, 이는 분별인 마음과 그 마음 따라 일어나는 생각과 뜻이 바탕한 본성까지 포함된 의미이지요.
즉 우리의 성품은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공적성성한 정신과 두렷하고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공적영지한 분별성의 마음으로 구분할 수가 있고, 이 성품에 바탕한 허령불매한 각자의 영혼은 견성을 한 부처의 마음과 견성을 하지 못한 중생심이 있는데, 심지(心地)에서 심(心)이 좁은 의미로는 분별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성품의 공적영지한 분별성과 또한 성품에 바탕한 허령불매한 정신바탕인 영혼의 분별하는 마음 따라 일어나는 생각과 뜻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면, 지(地)는 생각과 뜻의 원인인 분별하는 마음의 바탕이 되는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인 정신을 의미하지요.
인간의 성품은 선한 것이라는 성선설(性善說)과 악한 것이라는 성악설(性惡說)이 있으나, 단전주선의 1단계인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일 때나 2단계인 공적영지한 무상의 자성혜의 상태에서는 무선무악(無善無惡)이지만, 자신의 의지가 포함된 3단계의 분별하는 마음에 생각과 뜻이 더하여지면 1~2단계에 바탕한 불심과 1~2단계를 망각한 중생심으로 나뉘어져서 경계 따라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한 능선능악(能善能惡)이 되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성품이 정(靜)할 때는 본연청정하여 무선무악하지만, 성품이 동(動)하여 마음 따라 생각과 뜻이 일어나면 능선능악이 되는데, 육식(六識)의 경계에서 마음이 본성에 바탕하여 순하게 발하고 곧게 발하고 참이 나타나면 심지가 맑고 밝고 발라서 극락을 체험하고 낙원을 누리게 되니 인간의 성품은 성선설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마음을 거슬러 발하고 굽게 발하고 가림을 받게 하면 심지가 요란하고 어리석고 글러서 지옥 같은 고통의 삶이 되므로 성악설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공적성성하고 공적영지한 성품에 바탕한 마음과 생각과 뜻을 일으키면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으나, 경계에서 자신의 마음에 따라 생각과 뜻을 일으킬 때 공적성성하고 공적영지한 성품에 바탕하지 않으면 사상(四相)이 나고 외경에 집착하게 되므로 성품이 망각되어 마음이 요란하게 되는 것이지요.
‘심지는 원래(原來) 요란함이 없건마는~’에서 원(原)의 의미가 공적성성하고 공적영지한 성품적인 면이라면, 래(來)의 의미는 성품에 바탕한 자신의 의지에 따른 분별인 마음에 생각과 뜻이 더해진 것이라 볼 수 있지요.
그러면 심지에 요란함이 없게 하는 자성의 정은 어떻게 세우는 것일까요?
자성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성품을 의미하며, 정(定)이란 요란하거나 흔들리지 않은 안정한 상태이지요.
따라서 자성의 정을 세우는 방법은 영적(靈的)으로는 바깥 경계에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육근의 문을 닫고 자신의 영혼을 단전토굴에 주하게 하고, 기적(氣的)으로는 진공의 중심인 단전으로 호흡함으로써, 기적으로 텅 빈 진공의 고요한 가운데 영적으로 별빛처럼 초롱초롱함을 인식하는 성품의 공적성성한 정신을 체험함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지요.
참 나인 내 영혼이 본성을 잃고 욕심대로 살아간다면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은 참나가 아니고 단지 나의 영혼이 살아가는데 있어 영적인 활동에서 단지 분별을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는 마음이 참 나인 줄로 착각하여 분별인 마음이 일어날 때 자성의 정혜계가 아닌 무명의 탐진치로 살기 때문에 결국 불행과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누가 이러한 비극적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영혼과 마음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결국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비극적인 불행한 삶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계를 따라 마음이 요란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일이 없으면 좌선과 염불 등으로 자신의 영혼이 안으로 공적성성한 본성으로 회광하여 정(定)에 들어 외경에 끌려 다니는 영혼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내정정(內靜定)의 정력(定力)을 쌓고, 일이 있을 때에는 밖으로 육경을 대하더라도 보아도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는 것처럼 마음이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성품에 바탕하여 지혜를 발하는 외정정(外靜定)의 정력을 쌓아야 하는 것이지요.
경계가 없을 때에 하는 내정정과 경계가 있을 때에 하는 외정정의 수행에서 알 수 있듯이 일이 없을 때나 일이 있을 때나 언제나 본성에 입정함이 근본이 됨을 알 수 있지요.
만약 일이 없을 때 무념의 자성정을 세울 줄 모르면 일이 있을 때의 마음과 생각은 자성의 혜를 상실한 상태에서 상(相)에 가려서 마음과 생각을 일으키므로 본성에 바탕한 온전한 생각이 되지 못하여 그릇된 취사(取捨)를 하게 되지요.
내정정이란 육근의 문을 닫고 경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공적성성한 자성의 근본인 체(體)에 합일한 것이라면, 외정정이란 육근의 문을 닫고 자성의 정에 입정해 있던 영혼이 육근의 문을 열고 밖으로 경계를 접할 때 내정정인 공적성성한 자성의 정에 바탕한 공적영지한 자성의 혜를 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정과 혜에 있어서 근본인 체(體)는 정(定)이며, 혜(慧)는 체(體)인 정(定)의 용(用)인데, 내정정인 무념의 자성정이 체(體)라면 외정정인 무상의 자성혜는 용(用)이며, 내정정인 무념의 자성정이 잘 세워지면 좌선 즉 정선(靜禪)이 잘되어진다고 하고, 좌선에 바탕하여 외정정인 무상의 자성혜와 무상의 사리연구와 무상의 작업취사가 잘되면 활선(活禪)이 잘되어진다고 하며, 정선과 활선을 합하여 무시선 또는 동정일여선이라 하고, 이 무시선을 단전주선의 5단계인 무주의 자성계 또는 무주의 작업취사라 하지요.
중생의 마음은 경계를 따라 마음이 요란해지지만 부처의 마음은 공적성성한 본성에 입정할 수 있는 관계로 어떠한 외부의 충격적인 변화가 생길지라도 결코 마음이 흔들리거나 요란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부처나 중생이나 분별성인 마음의 작용은 다 같이 있으나, 중생은 육경을 대할 때 마음이 단전의 공적성성한 본성을 잃어버리고 자기라는 상(相)에 가려 무명이 되어 마음과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항상 육경에 끌려 다니며 거기에 집착을 하고 속박이 됨으로써 스스로 불행과 비극을 자초하지만, 부처는 무념(無念)의 본성에 바탕하여 자기라는 상을 초월한 무상(無相)의 자성혜에 바탕하여 육경에 응함으로써 극락을 체험하는 가운데 지혜가 나타나서 은혜로운 낙원의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즉 중생의 분별은 자기라는 상(相)이 개입된 무명(無明)에 의한 번뇌적인 분별심이므로 불행과 비극을 가져오지만, 부처의 분별은 무념의 공적성성에 바탕한 공적영지한 지혜의 분별성이므로 행복과 기쁨을 가져오기에 행복하고 은혜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성의 정을 세워야 하는 것이지요.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마음은 원래 성품에 바탕할 때는 어리석지 않으나 외경을 따라 성품을 떠나 외경에 휘둘리면 탐진치가 발생하여 어리석은 분별이 되어 망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심지가 육근을 통해 육진을 접할 때 육경에서 육식의 분별이 어리석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회광에 기초한 반조를 하면 되는 것이지요.
자성의 정을 세우기 위해서 회광으로 입정을 하여 일심인 무념의 자성정인 정신을 차렸으면 다음엔 그에 바탕한 자성의 혜를 세우는 무상의 반조를 해야 되지요.
즉, 자신의 영혼이 자신의 몸 안의 가장 깊은 중앙의 단전에서는 혼란스럽게 하는 감각이 아니라 진공의 텅 비어 고요한 가운데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공적성성한 자성정과 텅 비어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공적영지한 자성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단전주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영혼이 단전에 회광하여 무념의 자성정을 세운 상태에서 다시 육근을 통해 육진을 접하는 반조를 하면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데 이때를 공적영지의 광명인 무상의 자성혜가 세워진 상태라 하는 것이지요.
자성의 지혜를 발하면 심지가 육경이란 경계를 만나더라도 무상으로 올바르게 분별하는 공적영지한 성품의 마음이라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의 경계(境界)가 완전히 트여서 자재함을 얻은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성의 정은 제각각의 영혼이 몸의 중심인 단전에 주하는 회광을 하여 입정을 함으로써 텅 비어 고요한 공적에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정신인 공적성성한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세워지는 것이라면, 자성의 혜는 우리의 영혼이 공적성성한 자성정의 광명을 육근을 통해 육진을 비추는 출정을 할 때 무아(無我)인 무상무착(無相無着)<줄여서 무상>의 공적영지한 분별성이 되도록 하여 세우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성혜가 세워져야 생활 속에서 육경에 처하여도 일과 이치를 올바르게 연구하는 무상의 사리연구를 할 수가 있으며, 무상의 사리연구가 바탕이 되어야 무상의 작업취사도 이룰 수가 있지요.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자성의 계는 어떻게 세우는 것일까요?
자성의 계는, 일이 없을 때는 회광하여 무념의 자성정을 세우고, 일이 있을 때는 반조하여 무상의 자성혜를 세워서 무상의 사리연구와 무상의 작업취사를 원만하게 실행하는 것으로써 그 방법은 무주가 되지요. 그래서 무주의 자성계라고도 하지요.
무념의 자성정이 우리의 영혼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일어나지 않은 공적성성한 입정인 정신수양(精神修養)이라면,
무상의 자성혜란 우리의 영혼이 안으로 단전으로 회광하여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의 상태에서 밖으로 육근을 통해 육진을 반조하여 육경에서 육식이 일어날 때 안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고 또한 밖으로 육진의 모든 상(相)이 진공에 바탕해 있음을 깨달아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집착하지 않고 응하는 지혜를 말하는데 이는 무상의 사리연구(事理硏究)와 무상의 작업취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무주의 자성계란 우리의 영혼이 일이 없을 때는 단전에 정신과 기운을 주(住)하여 공적성성한 무념의 자성정을 세우고, 일이 있어 반조를 하여 육근을 통해 육진을 대함으로써 육경에서의 육식이 일어날 때는 공적영지한 무상의 자성혜를 세워서 무상의 사리연구와 무상의 작업취사를 해야 하는데 이들 4가지를 상황에 맞게 선택해서 원만하게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일상수행의 요법 1조~3조를 보면 끝부분에 ‘~자성의 정, 혜, 계를 세우자’라고 되어 있는데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왜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우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세운다는 의미는 땅과 같은 바탕에 중심을 두고 옆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위로 쌓아 올리는 것을 의미하지요. 예를 들면 집을 짓는 경우라 할 수 있겠지요.
집을 지을 때 밑바탕이 되는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높이 쌓아갈수록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기둥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울어지며 결국 집은 무너지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의 삶도 심신을 작용할 때 몸의 중심과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건강과 행복을 이룰 수가 있는데, 그 방법은 몸의 중심인 단전에 정신과 기운을 주하는 단전주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단전에 정신과 기운을 주하여 호흡도 하고 분별하는 마음과 그 마음에 따른 생각을 하여야 중심을 잃지 않고 어떠한 경계가 닥치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집을 지을 때 기초를 튼튼히 해야 건축물을 잘 세울 수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도 근본인 자성을 튼튼히 하지 않으면 결국 불행과 비극을 맞게 되므로 여기서 ‘세우자’는 용어를 사용하셨던 이유는 근본인 자성을 튼튼히 해야 된다는 의미이지요.
또한 일이 없으면 공적성성한 자성정에 들어가고 일이 있으면 공적영지의 자성혜로 육경을 비춰보아 자성으로 분별하고 생각하고 행동함을 때에 맞게 실행하는 무주의 자성계는 무시선 무처선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공부법이지요.
만약 이 무주의 자성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색명리를 추구한다면 재색명리에 얽매여서 결국 영혼은 재색명리의 감옥에 갇혀 지옥 같은 고통의 삶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인생은 재색명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욕심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설사 목표를 이룬다 하더라도 무주의 자성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행복은 절대로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무념의 자성정에 들거나 무상의 자성혜를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음은 항상 무명에 의한 착각을 일으키고 생각은 잡념과 망상으로 흐르기 때문에 기운은 상기되어 신체적인 불균형을 발생시켜 심리적인 불안을 야기하게 되지요.
과연 우리가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허망한 인생으로 준비 없이 살다가 죽어갈 때 지옥이나 축생으로 떨어진다면 어느 세월에 또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진리를 깨닫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재색명리만 보이고 자신의 성품인 자성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자성인 본성을 잃은 상태에서 재색명리를 추구함으로써 결국 불행과 비극의 삶으로 이어지지만 지혜로운 자에게는 본성이 먼저 보이고 재색명리는 본성에 바탕해서 보기 때문에 재색명리에 끌려가지 않고 지혜롭게 거기에 응하므로 그것들이 오히려 영원한 복락을 장만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무념의 자성정, 무상의 자성혜, 무상의 사리연구, 무상의 작업취사를 선택적으로 원만하게 수용하여 실행하는 무주의 자성계를 세우는 것은 행복의 필요충분한 조건이지요.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 중에 핵심적인 용어인 무념, 무상, 무주라는 용어는 육조단경에 무념위종(無念爲宗) 무상위체(無相爲體) 무주위본(無住爲本)이라는 용어에서 따온 말인데, 이를 부연하여 해석하면,
무념위종(無念爲宗) 무상위체(無相爲體) 무주위본(無住爲本)에서 종(宗) 체(體) 본(本)의 의미는 근본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의 순서가 종과 체와 본으로 나열된 이유는 마음공부에 있어서 제일 먼저가 되는 근본은 입정(入定)을 하여 자성의 정을 세우는 입정(立定)을 하는 것인데 이때의 심경은 무념(無念)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종(宗)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고, 그 다음의 단계는 입정(入定)해 있던 마음이 출정(出定)을 하여 육경(六境)에서 육식(六識)을 발할 때의 마음공부의 근본은 무상(無相)으로 해야 한다는 뜻에서 체(體)를 사용한 것이며, 마음공부에 있어서 최종적인 단계로는 무념의 자성정과 무상의 자성혜를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육근(六根)을 통해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주라는 의미로써 이때는 무주(無住)가 근본이 된다는 의미이지요.
4) 신(信)과 분(奮)과 의(疑)와 성(誠)으로써 불신(不信)과 탐욕(貪慾)과 나태(懶怠)와 우치(愚癡)를 제거하자
(1) 진행사조(進行四條) ; 실행해야 할 네 가지 조목
신(信) 즉 믿음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공적성성하고 공적영지한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생기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지요.
우리가 안으로 입정(入定)인 정신수양을 통해 공적성성한 정신인 본성을 깨닫고, 밖으로 출정(出定)할 때 공적영지한 분별성을 깨달으면 지(智)가 나타나고, 이 지에 바탕하여 생각을 일으키면 혜(慧)가 나타나는데, 이처럼 성품인 지에 바탕한 자신의 마음작용인 혜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요란하거나 어리석지 않아서 그릇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진리적인 확고한 믿음의 자신감이 생기는데 이것이 만사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분(奮)은 분발을 의미하는데 이 분발(奮發)은 용장한 전진심으로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기어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이지요.
의(疑)는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인데 이는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며
성(誠)은 정성을 의미하며 이는 간단(間斷) 없는 마음과 실천력으로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2) 사연사조(捨捐四條) ; 버려야 할 네 가지
불신(不信)이란 신(信)의 반대로 믿지 아니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결정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써, 불신하는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든 진행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탐욕(貪慾)은 모든 일을 상도(常道)에 벗어나서 과(過)히 취(取)함을 의미하며
나태(懶怠)란 만사를 이루려 할 때 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을 의미하며
우치(愚癡)는 대소유무(大小有無)와 시비이해(是非利害)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恣行自止)함을 의미하지요.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고자 하면 첫째, 정의로운 일이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본성에 바탕한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둘째, 분발로써 용기 있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용장심을 갖추고 셋째, 의구심으로써 일과 이치를 연구하여 깨달아 알고 넷째, 정성으로써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신과 탐욕과 나태와 우치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불행의 요소들이기에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되는 것이지요.
5)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우리 인류는 세상에서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지요. 하늘의 공기가 있으므로 호흡을 하고, 땅의 바탕이 있으므로 몸을 의지하고, 해와 달의 밝음이 있으므로 세상 만물을 분별할 수 있고, 바람과 구름과 비와 이슬이 있으므로 만물이 생육되어 그것을 먹고 살수가 있으며, 부모님의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은혜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 동포의 은혜로써 배우고 연구하여 모든 학술과 정사로 우리를 지도하여 주는 사(士)의 은혜와 심고 길러서 우리의 의식 원료를 제공해 주는 농(農)의 은혜, 각종 물품을 제조하여 우리의 주처(住處)와 수용품을 공급해 주는 공(工)의 은혜와 천만 물질을 교환하여 우리의 생활에 편리를 제공해 주는 상(商)의 은혜 그리고 정치와 종교의 법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사농공상의 기관을 설치하고 지도해 주고 지식을 함양하게 하고, 시비이해를 구분하여 정의롭고 안녕한 생활을 유지하게 해주는 법률의 은혜가 있어서 우리가 은혜롭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므로 이 네 가지 은혜에 보은하는 생활이 곧 우리 인류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지요.
특히 중요한 점은 일상수행의 요법 1조 ~ 3조에서 알아본 것처럼 자성(自性)의 정혜계(定慧戒)를 세우는 생활은 원망심이 나오게 하는 역경(逆境) 마저도 초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에 자성(自性)에 바탕한 생활을 한다면 감사심이 아니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6)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타력적인 생활은 당장은 편한 것 같으나 사실은 자신의 운명이 타인에 의해 결정이 되도록 하는 것이기에 정말 어리석고 불안한 삶이 아닐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자력으로 사는 생활은 당장은 힘이 드는 것 같으나 자신의 행복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보람과 희망과 용기를 솟아나게 하므로 더욱 활기차고 행복한 삶이 되게 하지요.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무지하면 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세상에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지요.
세상에 태어나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지식을 갖추어야 하나니 지식을 갖추려면 학식과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가르치고 지도할 수가 있으므로 아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지요.
모르면 남의 결정에 따르게 되고 그 결정이 잘못되면 나에게는 불행이라 어찌 배우지 않아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겠습니까.
자신의 행복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실현되고 타인에게도 행복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다면 은혜롭고 가치 있는 인생이겠죠.
그러므로 은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인생이 되려면 실력을 갖추기 위해 잘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자신이 실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지요.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은 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면서 남에게는 가르쳐 주지를 않는다면 세상의 은혜에 보은하지 않고 배은을 하는 것이어서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도 그만큼 어둡게 되겠지요.
또한 인류는 넓게 보면 지구라는 집에 함께 사는 한 가족이므로 남의 자녀도 형편이 허락되는 대로 가르치면 그 가르침의 은혜를 받은 학생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한다면 결국 현생과 영생을 통하여 자신에게도 행복이 돌아오는 것이지요.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사회의 평화와 발전이 개인의 행복과도 직결되지요.
가정 직장 국가 세계가 은혜롭고 행복해지려면 그 구성원인 한 개인부터 공익심을 실천할 때 가정 직장 국가 세계가 화합되고 발전하는 것이지요.
공중이 발전하고 평화로우면 개인의 생활도 자연히 은혜롭고 행복해지는 것이므로, 공익심 없는 생활을 공익심 있는 생활로 돌리는 삶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실천덕목이지요.
또한 공익을 위해 사신 분에게 감사하고 숭배하며 보은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지요.